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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에게 보낼 동인지를 찾아 볼 심산으로 책장 앞에 선 휴일 아침, 빼곡한 책들 속에서 아주 오래된 공책 한 권을 꺼내든다. 표지도 장식도 없고 줄도 없이 종이로만 엮어 만든 시작노트였다. 순간 아주 오랜만에 내 생의 눈빛이 반짝였다고 생각했다. 10여 년도 더 된 것 같은데 왜 그동안 기억나지도 눈에 띄지도 않았을까. 거의 매일 몇 줄 쓰다 몇 줄 지우고 다시 몇 줄 쓰다 한 장씩 찢어 버리던, 내 찰기 넘치던 글쓰기의 반증 같은 산물. 볕이 궁한 다락방 구석의 문갑처럼 정지된 시간 속을 무심히 지나며 느리고 깊게 빛바래 가던 공책 하나, 처녀애들의 동맥처럼 들끓던 내 중세의 골동품이다. 자리를 잡고 앉아 천천히 한 장씩 읽어본다. 오래된 낡은 공책은 종이를 묶어 놓았던 접착제가 말라버린 탓에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잘게 떨어졌지만 이상하게도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적당히 기분 좋을 만큼 변색된 종이도 마음에 들었다.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을 응시하는 안타까움, 그 깊고 수척한 회억들을 어쩌면 우리들은 하나 둘씩 지니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낡고 오래된 것에 끌리는 촌스런 취향은 사소한 공책 한 권을 보며 마음이 편해졌지만 한편으로는 절묘하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과 생각이 원하던 것, 하지만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던, 요즈음의 내 복잡한 심사를 되돌리기 위해 꼭 필요하던 일이 조금 더 확연해졌다. 시심의 회복은 너무 먼 길을 돌아온 셈이다. 아무튼 그랬다. 오랜만에 보니 비뚤어진 글씨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한 것을 보며 피식 웃는다. 뒤늦게 찾아 든 동인지를 들고 우체국을 향하는 마음이 그럴듯하다. 근데 정말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ㅋ
노트 펴기
세상을 살다보면 하도 어이가 없어 쓴웃음만 나오는 일들이 종종 있는데, 요즈음 떠도는 황구라의 헛소리가 그렇다. 지금까지 스스로를 불편부당한 사회에 문제의식을 가진 진보작가라 여기던 사람,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하던 시절 휴전선을 넘어 시대적 아픔을 몸소 받아들였던 사람,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쓰며 목숨을 걸었고 소설 '오래된 정원'을 쓴 사람, 지난 대선에선 MB집권을 막기 위해 독재타도를 외치다 총대를 메겠다며 비상시국선언을 한 사람이 황석영이다. 그런 그가 본격적으로 찌질한 삽질과 구라를 늘어놓는다. 욕먹을 각오가 되어 있다니 가관이다. 그에겐 이제 광주 민주화항쟁이 광주사태가 되었고 용산참사는 실책이긴 하지만 좋은 나라 유럽에서도 있던 일이니 우리도 그런 걸 겪으면서 사회가 나아가는 것이라 한다. 거룩한 큰 틀을 운운한다. MB야말로 중도실용주의자라고 떠벌이며 좌우를 가리는 게 우습다는 논리를 펴면서 지금으로선 한나라당이 전국정당의 기틀을 마련한 진보란다. 천천히 나팔수를 넘어 완장 하나 차려는 냄새가 난다. 그가 온갖 자리에서 빛나는 구라로 좌중을 유쾌하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빨로 고작 젊은 애들이 철이 없어서 군대가 다시 총칼을 들이밀 빌미를 제공한다는 썰을 풀어야 할까. 무엇보다 황구라의 말 속엔 온당한 근거가 없다. 단지 그의 표현대로 '핀란드 여자애'의 한 마디와 MB의 '나는 중도랍니다'라고 해준 말씀, 우아떠는 알타이문화운동과 새로 간을 본 권력에 대한 욕심 뿐이다. 겨우 내세운 것이 나잇살이다. 우리는 이제 최소한의 상식마저 그리워해야 하는 시대에 산다. 별별일이 있어도 그러려니 하며 꾹 참고 산다. 허나 일말의 개연성도 수치심도 없는 논리로 자기 생의 내력에 똥점을 찍는 황구라의 위선과 헛소리를 보며 측은하기까지 하다. 소화불량이 도진다. 그저 말없이 두툼한 홍두깨로 주둥아리를 냅다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불끈 일지만 굳이 손쓰기도 아깝다. 그럴 만한 가치도 없고.
![]() 분을 참기 힘들어서 냅다 달리기 시작했는데, 알량한 자존심을 무너뜨리지 않으려고 오기 혹은 각오를 다지는 의미로 어금니까지 악물고 달리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숨이 턱까지 차 올라 배가 끊어지는 것 같더군. 이러다 쓰러져도 좋을 것 같아서 나는 오만상을 찡그리며 달렸지. 악을 쓰며 계속 달렸지. 누군가를 증오하는 건, 독한 마음을 섞어 분을 품는 건, 어쩌면 스스로를 향한 일종의 저주가 아닐까 싶어. 결국 참을 수 없어서 허리를 꺾고 말았지. 웃기는 건 심장이 파열할 것 같은 그 시점에 나는 분이고 뭐고 다 잊은 채 단지 숨이 차서 죽을 뻔했다는 거야. 오늘 내가 삼켰던 독을 정신없이 토해냈던 거지. 87년 오월은 정말 뜨거웠다. 매일 이어지던 연세대 앞 시위, 숱한 사과탄, 눈알이 빠질 듯한 통증, 주먹질과 곤봉세례. 김지하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고 남아있는 건 그의 시 한 편 뿐이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우스운 건 그토록 절실하던 외침이 끝나고 사과탄을 뒤집어 쓴 채 숨이 막힐 때 나는 정말 숨이 차서 죽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전두환과 노태우의 계산된 자진납세, 6.29선언이 있었다. 광주의 오월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지난 날의 어설펐던 분과 독이 진심이었을까 자문하게 된다. 술자리에서 안주로 씹어대며 적당한 울분을 소주잔에 채우는 이들과 마주칠 때마다 술잔을 꺾어야 했고 숨어사는 사람처럼 침묵했다. 부끄럽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고 했던가. 그러나 한 시절이 가고 한 시절이 오는 동안 광주는, 타는 목마름은, 아직 제대로 된 꽃상여 한 번 타보지 못했다. 부디 이 일이 우리 가슴 속에 풀지 못할 결계로 남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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