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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 온 더 브릿지. 화면부터가 흑백인 이 영화는 절망에 대한 리포트다. 나는 불행 빼고는 가져 본 적이 없어요. 창녀 아델을 연기한 바네사 파라디가 다리 위에서 읊조리던 몽환적 절망이 그렇고, 그녀를 바라보던 가보의 공허한 눈빛이 그랬다. 영화는 내내 섬세한 인간 심리의 단면들을 흑과 백의 음각 같은 채색으로 묘사하며 삶과 사랑에 대한 거대한 질문을 남긴 채 끝나지만 무거운 마음보다는 일말의 내밀한 충만감을 맛보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다리 위에서 시작된 만남과 칼던지기 서커스, 지중해를 관통하는 여정. 아델이 서 있는 곳으로 칼이 과녁에 꽂힐 때마다 강렬해지는 두 사람의 성적 은유는 자극적이지만, 영화는 분명히 절망을 넘어선 행복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 낯선 경계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맵쌀한 현실과 손에 잡히지 않는 희망의 틈새마다 누벨바그의 뚝심처럼 사랑과 비약이 전개되어 간다. 남녀의 절망을 삶의 애착으로, 우연을 운명으로 바꾸는 사랑의 해석은 매혹적인 재즈선율과 함께 마음에 하나의 파문으로 번져나간다. 그래서 걸 온 더 브릿지는 다시 희망에의 리포트다. 기억 속의 프랑스영화들은 대체로 따분했다. 소통은 너무 어렵고 뭐라고 뭐라고 하는 묘한 발음의 말들은 지루했으며 심심하기만 했다. 적어도 파트리스 르콩트 감독을 만나기 전까지는. 우연한 기회에 그의 영화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을 비디오 테이프로 보면서 고집처럼 쌓여있던 선입견이 조금쯤 무너졌으니 말이다. 그리고 몇 년 전에 친구와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봤던 '친밀한 타인들' 또한 육포처럼 꼬순 맛을 느끼기에 충분했으니 파트리스 르콩트 감독의 영화가 나와 그런대로 궁합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떨고 있네요. /난 떨지 않아, 네가 꿈꾸고 있는 거야. 아마도 우리 둘 다 꿈을 꾸는 건지도 모르죠. 그렇게 나쁘지 않은 꿈... 갈 준비 됐어요? 어디로? 아무 데나, 우리가 어디를 가든, 내게 던질 칼 몇 자루는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어찌 됐건 우리에게 선택권은 없어요. 내가 뛰어내리지 않으면, 당신이 뛰어 내릴 테니까… 우린 이렇게 살 수 없어요. 이렇게? 하나가 아닌 둘로는.../ 흐린 날의 쓸쓸한 오후처럼 엇갈린 명암 속에 펼쳐지는 섬세한 감정들, 걸 온 더 브릿지는 한동안 잊혀지지 않을 세느강의 물결 같은 영화다. 오늘도 사랑을 잃은 사람들은 하나 둘씩 세느강으로 간다. 변명이란 말을 생각한다. 변명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잘못이나 실수에 대하여 구실을 대며 그 까닭을 말하는 것'이나 이 말은 변명의 진짜 속내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변명에는 자기 잘못에 대한 반성과 그로 인한 미안함이 결여되어 있거나 아예 삭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교묘한 언변으로 그 일을 타당하게 만드는 둔갑술이 녹아있다. 사람을 현혹시키는 흑마술 같다. 의뭉스런 면피의 비겁함이 보이며, 면죄부를 바라는 꼼수의 냄새가 난다. 물론 모든 변명이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부모에게 혼이 날 것을 염려하는 아이가 울먹이며 자기 잘못을 숨기는 경우가 그렇고 연인에게 약속장소에 지각한 이유로 가져다 붙이는 핑계와 같은 것들이 그럴 것이다. 이런 경우 우리들 대부분은 잘못을 설명해주거나 웃어 넘기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변명에도 격이 있는 법이다. 여기에서의 격이란, 죄질이란 말과 동의어다. 자기 잘못을 알고도, 더군다나 남에게 해를 입히고도 책임을 피하기 위해 뻔뻔한 거짓말을 이어 간다면 이것은 더 이상 귀여운 변명이 아니다. 깊은 반성과 더불어 그에 상응하는 조치가 필요한 잘못이라면 이런 변명은 그 이름 앞에 여러 - 비겁한, 치졸한, 더러운, 같은 - 수식어가 붙는 것이다. 알량한 체면과 위신을 위해 늘어놓는 이때의 변명은 억울함에 대한 자기 변호가 될 수 없다. 자기 주장이 녹아 있는 반론도 아니고 문제에 대한 심리를 거친 반증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보기에 딱한, 값싸고 군색한 자기 보호일 뿐이다. 이제 자기를 부인하고 진실을 뒤엎는 자에게 묻는다. 도망만 다닌다면 자신의 진짜 인생은 어디서 오는지, 고귀하거나 선한 삶이란 것이 거짓으로도 가능한지 말이다.
한밤중, 도둑을 따라가 본다. 저기 멀리 낮에 봐두었던 집이 하나, 저 집 안의 세상은 시간이 멈추어져 있고 사람들은 세상 밖으로 분주하다. 창문을 본다. 창문이란 하나의 주요한 소통이자 창구이다. 창문을 통해 세상 밖을 보고 풍경을 염탐하고 생존을 위한 징후들을 읽는다. 그것은 밖에서도 마찬가지다. 저 집이 불이 꺼진 채 텅 비어있다. 집주인은 집이 잠든 것을 모르고 또 어디서 심란한 세상을 만나고 있을까. 주인이 길 위의 살이를 가파르게 유지하는 동안 집은 묵묵히 불을 끄고 앉아 창문으로 무수한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작은 돌을 던지고 기다려 본다. 기척이 없다. 다시 던진다. 제발 아무도 기척이 없어라. 아무도 창문 밖을 내다보지 말아라. 들어선 집안, 누군가의 온기들이 낯설고 생경하다. 장롱을 뒤지고 집안의 모든 서랍을 열어 주인의 기념들과 호사와 장식들을 찾아낸다. 언제나처럼 숨이 턱에 찬다. 한 번도 끊어지지 않는 긴장한 호흡. 순간만큼은 경건한 것이다. 마음은 급하고 정적은 무겁게 등을 민다. 나가자. 창문을 통해 세상 밖으로 집주인처럼 나가자. 눈이 오는 거리로 나가 행인들 사이로 등을 굽히고 걷는다. 바쁘게 걸어가는 도둑의 뒷모습, 창문은 놀란 듯 입을 벌린 채 바라보고만 있다. 집안은 내력을 잃어버린 껍데기처럼 싸늘하게 그러나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식어간다.
도둑은 길 위에 방치된 마음을 주워 달아나는 행인인 셈이다. 어쩌면 관습을 등짐처럼 지고 사는 낡은 반복에 대해 긴장을 배달하는 짐꾼 같다. 또 어쩌면 모든 생이 훔치고 달아나거나 훔치려고 기를 쓰는 것임을, 혹은 귀한 것을 잃어버리고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르는 일임을 알고 있는 살이꾼 같기도 하다. 한쪽에서는 훔치고 한쪽에서는 잃어버리는 일, 따지고보니 관계도 그렇고 그리움도 그렇다. 할 수만 있다면 억지로라도 가져오고 싶다. 망설이기를 거듭하다가, 욕을 먹는 수모가 연정과 상관相關의 열망에 비해 턱없이 보잘 것 없다는 생각이 들면 훔치기라도 해야하는 것이다. 값나가는 누군가의 마음을 송두리째 훔치고 싶고 심금을 빼앗아 울리고 싶다. 집안에 어지럽게 남겨진 발자국처럼 누군가의 가슴에 그리움이라는 족적을 남기려고 애를 쓴다. 흔적을 남겨 내내 그리워하게 할 참이다. 가진 바 전부 혹은 원하는 일정량을 저만치의 당신으로부터 자신에게로 이전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당신의 모든 것을 훔치고 싶어 안달하는 도둑의 심보를 가지게 되고 마는 것이다. 서로 소통하고 기쁘게 마음을 나누는 일이 아닌 모든 훔치고 잃어버리는 일이란 이미 처음부터 쓸쓸함을 상정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한 가지, 어떤 도둑이 있은 후 찾아오는 마음의 변이에 대하여는 유감이지만 딱 부러지게 단정지어 이런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정말 미안하지만 어느 누구도, 어떤 당신도, 이렇다 저렇다 미리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라면. 이 꼬불꼬불한 이름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향수를 추억합니다. 동치미와 청국장처럼 시원하거나 구수한 이름은 아니지만 라면만의 독특한 서정을 잊기는 어렵습니다. 어린시절 가장 맛있던 간식의 이름. 다리가 세 개인 밥상에 모여앉아 침이 고이는 입 안에 젓가락을 넣은 채 조바심이 나게 했던 성찬의 이름. 그 옛날 어머니께서 끓이시던 라면에 항상 들어갔던 국수다발을 생각합니다. 당시 라면 한 봉지의 값이 50원 근처였지만 그것마저 쉽지 않아 국수를 넣어 양을 늘리고 소금으로 간을 맞춘, 스프맛도 느끼기 어려웠던 정체불명의 국수라면은 아직도 아련한 유년의 기억입니다. 어머니를 헤아리느라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국수라면을 먹으며 생각하기를, 어른이 되면 매일 진짜 라면만 끓여 배터지게 먹으리라 몇 번이고 다짐을 했으니 말입니다. 이제 집에서 라면을 끓이는 일이란 두 번 생각할 이유가 없는 일이 되었고 취향에 따라서는 별의별 호사스런 재료까지 넣어 조리를 하지만 라면의 본질이 가지는 맛은 쉽게 희석되지 않습니다. 밀가루와 전분과 화학조미료의 배합 뒤에 숨어있는 어떤 그리움 같은 것들 때문입니다. 그동안 라면도 진화를 했고 지금 컵라면이라고 부르는 용기라면은 또 다른 뜨거움을 만들어내는 알라딘의 램프 같습니다. 맛대로 눈맛대로 만들어져, 물만 부으면 완성되는 하나의 식탁. 취기가 은근히 가시지 않은 귀가길에서도 좋고 늦은 밤 영화를 보다가 가벼운 허기가 들 때도 좋습니다. 봉지라면이 노란 양은냄비와 냄비뚜껑과 석유곤로와 연탄불같은 회억들을 가지고 있다면 컵라면은 이제 머리를 직접 맞대고 입김을 나누는, 손만 내밀면 닿을 것 같은 우리 시대의 스킨십입니다. 끓는 물을 부은 용기로부터 두 손에 전이되는 온기는 마치 안온한 포옹 같습니다. 뚜껑을 열기 전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가르며 바라보는 눈빛, 그 무언의 에피타이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나긋한 면발과 절절한 국물에 숨어있는 뜨거움이 목을 타고 넘을 때의 아득함과 익은 김치를 맛나게 먹다가 젓가락이 서로 움찔 부딪치는 즐거움, 그 간결한 식탁이 주는 곰삭은 연정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요. 시원한 김치 한 종지를 뚝딱 사라지게 만드는 적극적인 대시, 인스턴트의 위악적 한계를 뛰어넘은 작은 식도락이자 사랑처럼 설레고 몸이 더워지는 저 컵라면에 숨은 비밀 말입니다.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를 읽다가 작은 울렁증이 일었다. 아마도 신음이나 탄성 같은 미묘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내친 김에 나카무라 요시히로 감독의 영화까지 보았지만 자꾸 반복재생으로 돌려 보고 싶을 만큼 이야기는 쉽지 않다. 아니, 복잡하다고 느껴진다. 과거와 현재가 어떤 단서 하나로 연결되며 일으키는 독특한 감정의 파장, 적당한 진동으로 먹먹해지는 마음. 오리무중의 미로처럼 예측을 넘나드는 사유들은 마치 생의 지형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하다. 통증을 간직한 사람들에게 기억이란 얼마나 거대한 불가항력의 팩트인지, 또 얼마나 기약 없이 이어지는 심정적 유배인지 모를 일이다. 비극은 뒷문에서 일어나. 가와사키의 말처럼 비극은 종종 염두하지 않던 생의 뒷켠에서 일어나곤 하지만, 밥딜런의 노래를 들으며 걱정 같은 건 잠시 잊기로 한다. 그리고 괜찮다면, 언젠가 내게도 다시 꼬리끝동글말이가 나타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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