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어떤 친구에게 낙엽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한참을 생각했던 적이 있다. 떨어지는 이파리를 보며 우리가 처량한 가을을 생각할 때 그 사람은 나무를 생각했던 것이다. 낙엽은 하마 여름에도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내게 말하면서 우리가 가을에 싸잡아 쓸쓸해 하는 것을 이미 한 계절 전에 경험하여 정작 가을에는 담담할 모양이다. 그러나 여름에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한숨을 쉬는 것보다는 역시 만추 한가운데서 으슬한 기운을 느끼며 젖어드는 상념이 제맛이다. 변함 없이 가을은 찾아들고 다시 우리는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거나 쓸쓸하다. 고궁을 자주 찾는 내가 유독 가을에 이르러서야 입장료가 아깝지 않은 까닭은 여기에 있으리라. 작은 내 가슴속에 휘몰아치는 이름 모를 쓸쓸함은 주인 없이 퇴색해 가는 넓은 궁궐의 한 모퉁이에서, 그 거대한 회한 속에서 상대적으로 보잘 것 없는 내 궁상이 제법 위안을 받기 때문이다. 거기 대한문을 들어서면서부터, 혹은 자경전 앞에 망연히 서 있다가, 어느 날은 거기 취향교 아래에서 나는 내 작은 회한의 파편들을 황급히 감추고는 이내 꾹꾹 눌러 담고야 만다.
이런 상상을 해 본다. 어느 회교국을 여행하다가 그 나라의 절대권력을 가진 군주에게로 나는 포박되어 간다. 그는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이렇게 묻는다. 만일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너는 죽는다. 그러니 이 물음에 열 번을 생각하고 답변하라. 그대는 정말 외롭고 쓸쓸한가? 괘씸하게 그대가 나보다 더 그러하단 말인가? 만일 이런 상황을 맞는다면 나는 굳이 열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단번에 '아니오'라고 말할 것이다. 아마도 놀란 눈을 치뜨고 '아니오'를 죽을힘을 다해 열 번은 외치지 않을까 싶다. 죽음보다도 더 우위에 서는 신념이나 가치는 여럿 있겠지만 적어도 오늘 내가 가지는 감정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언행과 심사를 사사건건 이 죽음 혹은 그것과 비등한 절박함에 비교하여 무게를 단다면 어찌 숨을 쉬고 살 수 있을까. 이런 상상은 나를 제압하고 위무하는 일종의 주술 같은 것임을 고백한다. 일전에 술자리에서 다른 친구가 들려 준 농이 제법 이 가을에 어울리는 듯 하다. "어떤 하루살이가 글쎄, 이틀을 살았대." 나는 한해살이나 하루살이라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가슴이 아련해진다. 짧은 세월의 태생적 한계는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들, 그리고 사람도 매한가지가 아니랴.
일전에 맛을 본 함초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도 희한한 맛이어서 주방장에게 물어보니 함초는 우리나라 서남해안의 갯벌이나 염전에서 자라는 한해살이풀이라고 한다. 해초가 아닌 육지식물이라 바닷물에 잠기면 그 생을 마감해야 하면서도 평생을 - 한해가 고작인 일생에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이 미안하다 - 바닷가에서 바닷물로 소금을 흡수하며 자라는 지구상에서 몇 안 되는 염생식물로, 소금기가 많은 갯벌일 수록 잘 자란다고 한다. 생활상이 아주 원시적이며 또한 본능적인 생존기능이 탁월하여 짠 염전의 구석에서 자라면서도 그 체내에는 어떤 종류의 식물보다도 미네랄이 많이 들어 있어 여러 종류의 질병치료와 예방에 상당한 효과가 있는 천연식품이라고 한다. 안으로 그 많은 소금기를 머금고도 함초는 속이 쓰리다고 한숨을 쉬거나 쉬이 지치지 않는다. 바닷가 사람들은 안다. 스스로 자라 안으로 안으로 염분을 채워 살아가는 함초라는 식물의 효용을. 그리고 그들은 배우지 않았을까 싶다. 모두가 마다하는 것을 속에 채우고 감내하면서도 다른 이에게 일절 투정을 부리지 않으며 다만 말 없이 살다가 가는 묵묵하고 장엄한 생의 이야기를.
여름은 끔찍하게 길었다. 때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지독한 형벌인가에 대하여 나는 배웠다. 그러나 그 위에 덤으로 배운 것이 하나 더 있으니, 두 발을 종종 구르다가도 돌아서면 정작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뻔뻔한 계절 가을만 해도 그렇다. 변하는 건 사람뿐인지 작년에 늘어놓았던 일들 위로 다시 몇 겹의 후회와 한숨이 쌓이는 것을 보면 사람의 사연이 참으로 복잡하고 무수하다. 유독 찬바람만 불면 왜 이리도 심사가 울퉁불퉁해진단 말인가. 손에 쥐고 놓지 않는 것이 너무 많은 까닭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을 것이며 부인하지도 않을 작정이다. 길 위에서 길을 잃는 것이 사람이고 보면 가슴을 졸이며 먼 데를 바라보는 일 또한 충분히 인간적이지 않은가. 다만 사는 일에 솔직하리라. 스스로에 대한 예의를 잊지 않을 것이며 간혹 넘어지거나 뒹구는 일에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운 누군가가 나타나 토닥이거나 안아주기를 바라는 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 정체불명의 쓸쓸함 앞에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가 함초의 생을 살면 어떠랴. 다시, 한 줌 햇살을 받으며 자라는 돌계단 모서리의 돌단풍으로 살거나, 습기 마를 날 없는 물봉선이면 또 어떠랴. 이것도 다 내 생의 이력이 분명할진대.